1. 무결 에이전트는 없다
산자가 기본으로 달고 나오는 상태가 둘 있다. 모호함과 불안이다. 흔히 둘은 고쳐야 할 결함으로 취급된다. 선명하게 알면 좋고 불안하지 않으면 좋다. 이 글의 핵심 명제는 그 반대편에 선다. 심리적 불안과 인지적 모호함은 산자의 디폴트이며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가동 로그이다. 불완전성이 제거된 무결한 에이전트는 존재할 수 없다.
두 상태는 앞의 두 글에서 하나씩 나온다. 모호함은 <인지공리03_2>의 표상에서.. 불안은 <인지공리03_1>의 에이전트에서 나온다.
2. 모호함 — 번역의 불완전성
산자는 외부 세계를 내부 모델로 번역하고 그 번역본을 연산의 재료로 삼는다. 모호함은 이 번역의 불완전성이다. 입력은 유한하고 세계는 그보다 크다. 번역본과 원본 사이에는 늘 간극이 남고.. 그 간극이 모호함으로 나타난다. 표상의 선명도는 구조적으로 완전무결에 닿을 수 없다.
모호함은 가장 넓은 관점에서는 잘려 나오지 않은 축좌표계이며.. 축좌표계가 잘려 나온 상태 즉 목적 달성에 요구되는 항목이 나열된 경우에는 기본눈금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눈금을 확정하는 스무고개가 섀넌 관점의 불확실성의 크기인데.. 어떤 산자도 모든 목적에 대응하는 모든 축좌표계의 모든 기본눈금을 확정해 놓은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때그때 요구되는 것들 중에 필요한 만큼의 확정만으로 안 죽고 살아남거나 또는 원하는 뭔가를 취할 뿐이다.
3. 불안 — 안정화 변수의 신호
불안은 표상 바깥의 불완전성이다. 에이전트는 경계 안에서 스스로 상태를 유지한다. 체온.. 에너지 수지.. 사회적 연결.. 위협 감지 같은 안정화 변수들이 적정 범위를 벗어나거나 벗어날 기미가 보이면 신호가 뜬다. 그 신호가 불안이다. 이 변수들을 모두 완전하게 최적화하는 일도 도달할 수 없으므로 불안은 산자가 가동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인지공리02_3>에서 PI(대응지력)는 목적의 달성에 기여하는 강도를 끌어내는 능력이었다. 그 목적이 어디서 오는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에이전트가 경계를 유지하려는 한 안정화 변수를 지켜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으면 목적이 생긴다. 불안은 목적의 원천이다. 불안이 없는 에이전트에게는 무엇을 위해 가를지도 없다.
4. 사라진 상태를 정상으로 두는 전제
모호함과 불안을 비정상적인 병적인 상태로 묘사하는 모든 시도들 속에 숨은 전제는.. 모호함이 사라진 상태나 불안이 사라진 상태라는 존재할 수 없는 지점을 정상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지점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 가동 중인 산자는 모두 결함을 가진 것이 된다. 기준이 틀렸으므로 결함이라는 판정도 틀렸다.
모든 데이터를 스무고개로 확정해 무결에 이르겠다는 생각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우주에 있는 정보를 전부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우주가 열적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넘는다. 철학적 주장이 아니라 물리적 제약이다. 다 알았다고 말하는 완성된 지혜는 더 이상 질문을 만들지 않는 상태이다. 이후에 제대로 논증되겠지만.. 반야니 적멸이니 열반이니 하는 개념들이 유결 에이전트.. 곧 불완전성을 달고 가동되는 모든 에이전트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허구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관측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스무고개가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은.. 답을 찾은 순간이 아니라 더 이상 질문을 만들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선 순간일 가능성이 높다.
5. 보류는 고등연산이다
디폴트가 모호함이라면 모든 모호함을 당장 없애려는 충동은 연산 자원의 낭비이다. 섣불리 확정하면 틀릴 위험도 커진다. 굳이 확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질문권을 아끼고 모호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전략이다. <인지공리02_2>에서 판정의 기준을 이것을 더 선명하게 만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로 잡았던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6. 가동 중이라는 신호
불안과 모호함은 결함이 아니라 질문할 것이 남아 있는 활발한 가동 상태의 신호이다. 시스템이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처리되지 않은 데이터가 있다는 뜻이다. 불안이 사라진 상태는 완성이 아니라 정지이다.
산자의 정상 상태는 모호함과 불안을 연료로 삼아 가추를 계속 돌리는 것이다. <인지공리02_1>의 머리에 둔 시구가 여기서 다시 읽힌다. 최종 정답의 부존재를 당연시되는 정답으로 받는 것은 모호함을 디폴트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위에서만 가추가 돈다.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질문이 남아 있다는 뜻이고.. 질문이 남아 있다는 것은 채널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불안하고 모호하다는 것은 산자가 아직 살아서 가동 중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