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공리03_2>

산자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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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것의 진화

앞의 글에서 산것은 소산가속장치로 출현한 에이전트였다. 외막으로 안과 밖을 가르고.. ATP로 에너지 흐름을 잡아 안쪽 질서를 지키며.. DNA로 자기를 잇는다. 이 장치는 출현한 뒤에도 같은 방향으로 계속 밀려갔다. 더 빨리.. 더 많이 에너지를 붙잡는 쪽이 남았다.

고생대가 열리는 캄브리아기에 그 밀림이 폭발한다. 짧은 기간에 오늘날 동물 문의 대부분이 한꺼번에 화석 기록에 나타나는 캄브리아 대방사이다. 이때 몸에 단단한 껍질과 가시가 생기고 사냥하는 동물이 나타났다. 외막이 무기와 방패가 되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앤드루 파커는 눈의 출현이 이 폭발의 방아쇠였다는 빛 스위치 가설(Light Switch Hypothesis)을 냈다. 책 『In the Blink of an Eye』에 정리되어 있다. 볼 수 있게 되자 쫓고 숨는 경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포식 경쟁은 에너지를 빼앗는 속도의 경쟁이다. 포식은 남의 외막을 뚫고 그 안에 지켜 둔 질서와 에너지를 가져오는 일이다. 항성의 광자에서 저장된 에너지를 먹고.. 그것을 먹은 몸을 다시 먹는다. 에너지가 흩어지는 경로가 층층이 겹치고 빨라진다. 척추는 이 경쟁의 한 답이었다. 몸을 받치는 축이 생기고.. 척수를 따라 신경이 모여 머리 쪽에 뇌가 자리 잡았다. 캄브리아기의 척추동물은 몸길이 몇 센티미터의 작은 물고기였고.. 바다의 상위 포식자는 새우형 절지동물과 오징어형 대형 포식자였다. 이들이 포식 경쟁 속에서 차례로 멸종한 뒤.. 어류의 시대라는 별명이 붙은 데본기에 와서야 척추동물의 대형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육지에도 척추동물보다 절지동물이 먼저 올라왔다. 어류에서 양서류와 파충류로 이어지는 줄기는 그 뒤를 따랐다.

2. 눈과 뇌, 1차 표상

눈과 뇌가 함께하는 일은 번역이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과 소리를 몸 안의 모델로 옮긴다. 저 앞에 무엇이 있고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내부에 그려 두고 그 그림을 보고 몸을 움직인다. 이 내부 모델이 표상이다.

이 단계의 표상은 대상에 태그를 붙이는 일이다. 저것은 먹이이고 저것은 위험이다. 태그는 감각에 붙어 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옮긴 그림이며 눈을 감으면 흐려진다. 이 글은 이것을 1차 표상이라고 부른다. 많은 동물이 1차 표상을 쓴다. 표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산자가 아니다.

돌을 쥔 손과 불. 몸 밖에서 먼저 소화한다.
돌을 쥔 손과 불. 몸 밖에서 먼저 소화한다.

3. 손과 도구와 화식

인간의 계보에서 손이 자유로워졌다. 두 발로 서자 앞발이 걷는 일에서 풀려났고 그 손이 돌을 쥐었다. 도구는 외막 바깥에 덧붙인 몸이다. <인지공리03_1>에서 산호석과 나무 줄기가 살아 있지 않은 재료로 경계를 넓혔듯.. 돌날과 막대는 살아 있지 않은 재료로 몸을 늘린다. 이빨로 할 수 없던 일을 돌날이 하고 팔로 닿지 않던 곳에 막대가 닿는다.

그리고 불이 들어왔다. 익혀 먹으면 같은 먹이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더 적은 소화 비용으로 얻는다. 리처드 랭엄은 화식이 소화에 들던 에너지를 줄여 큰 뇌를 유지할 여유를 만들었다는 요리 가설(Cooking Hypothesis)을 냈다. 책 『Catching Fire: How Cooking Made Us Human』에 정리되어 있다. 불은 몸 밖에서 먼저 소화하는 장치이다. 산것이 소산을 가속하는 방식이 몸 안에서 몸 밖으로 넘어갔다.

4. 언어와 상징과 문자

언어가 생기면서 표상이 감각에서 떨어져 나왔다. 사자라는 소리는 눈앞에 사자가 없어도 사자를 불러낸다. 언어는 대상에 붙이던 태그에 소리를 달았다. 소리가 된 태그는 대상에서 떨어져 따로 불러내고 서로 견주고 되짚어 볼 수 있는 것이 된다.

문자는 그 상징을 몸 밖에 새겼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쐐기 모양의 자국이 찍히면서 기억이 한 사람의 머리를 떠나 다음 사람에게 그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표상이 쌓이기 시작했다. 폴립이 죽어도 산호석이 남듯 쓴 사람이 죽어도 점토판은 남고.. 한 사람이 세운 표상 위에 다른 사람이 다음 표상을 세운다. 도구가 몸을 몸 밖으로 늘렸듯 문자는 인지를 몸 밖으로 늘렸고.. 운용은 세대를 거치며 정교해졌다. 몸 밖에 새겨진 태그는 눈앞의 사물처럼 다시 관측된다. 대상에 대한 태깅을 전제로 그 태깅 자체를 인식하는 것.. 이 글은 이것을 태그 인식이라고 부른다. 사자라는 말이 사자가 아니라 사자에 붙인 태그라는 것을 아는 층위이다. 태그 인식은 사자를 보는 자기 인식을 다시 보는 것.. 곧 인식에 대한 인식인 2차 표상과는 다른 층위이며 2차 표상은 뒤의 글에서 따로 다룬다.

점토판에 새긴 표상이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점토판에 새긴 표상이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5. 산자의 출현

산것 가운데 표상을 다루는 인지체계를 얻은 일부가 있다. 외부 세계를 내부 모델로 번역하고 그 번역본을 연산의 재료로 삼는다. 이 부분집합이 산자이다. 대상에 태그를 붙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태그를 태그로 인식하는 것.. 곧 태그 인식을 운용하는 것이 산자를 가르는 선이다.

산자의 연산이 인지연산이고 그 연산의 엔진이 가추이다. <인지공리02_1>에서 가추는 가설 공간을 여는 유일한 연산이었다. 가설 공간을 새로 열려면 지금 대상에 붙어 있는 태그가 대상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태그를 붙여 볼 수 있다. 태그를 갈아 끼울 수 있다는 인식.. 곧 태그 인식 위에서만 새 가설 공간이 열린다. 가추는 산자가 되면서 쓸 수 있게 된 연산이고.. 동시에 산자를 산자로 만드는 연산이다.

다음 글은 이 산자가 기본으로 달고 나오는 두 상태.. 모호함과 불안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