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공리03_1>

산것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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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스템과 에이전트

앞의 세 글은 인지의 도구를 다뤘다. 가추가 공간을 열고.. 격률과 정보량이 연 것을 판정하고.. 지력은 그 둘을 운용하는 방식에 따라 셋으로 갈렸다. 이제 그 도구를 쥐는 쪽을 볼 차례이다. 인지연산의 주체는 어디서 나왔는가. 이 질문은 생물학보다 한 층 아래에서 시작해야 한다.

겨울철 방 벽에 붙은 온도조절기를 보자. 방 공기의 온도를 받아.. 설정값과 견주고.. 보일러를 켜거나 끈다. 받고 바꾸고 내보내는 이 뼈대를 가진 틀이 시스템이다. 물레방아도 시스템이다. 이번에는 온도조절기가 방에 달린 부품이 아니라 스스로 벽을 두르고 그 안의 온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해 보자. 에이전트는 이렇게 독립 유닛의 속성이 더해진 시스템이다. 경계가 있고 그 경계 안에서 스스로 상태를 유지하며 작동한다. 산것도 산자도 이 에이전트의 한 갈래이다. 그렇다면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에이전트 같은 것이 왜 우주에 나타나는가이다.

2. 엔트로피와 시간

<인지공리02_2>에서 섀넌의 엔트로피는 불확실성의 크기였다. 섀넌이 그 식에 엔트로피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열역학의 엔트로피 식과 모양이 같았기 때문이다. 열이 퍼져 나가는 정도를 재던 식과 모르는 정도를 재는 식이 같은 구조를 가진다. 이번에는 그 말을 원래 자리인 열역학으로 되돌려 흐름으로 본다.

엔트로피는 늘어나는 방향으로만 간다. 뜨거운 커피는 식고 식은 커피가 저절로 데워지지 않는다. 물리 법칙 대부분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성립하지만 엔트로피 증가는 방향을 가진다. 그래서 엔트로피 증가는 시간이 흐른다는 물리적 단서가 된다. 실재하는 계는 모두 엔트로피를 늘리며 에너지를 흩뜨리는 소산계이다.

물은 소용돌이를 틀며 더 빨리 빠져나간다.
물은 소용돌이를 틀며 더 빨리 빠져나간다.

3. 끌개와 해밀턴

소산계의 궤적은 예측할 수 없다. 나비효과는 작은 변수가 큰 결과를 낳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리 정밀한 시뮬레이션도 실제와 일치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예측 불가능한 계에도 질서는 있다. 초기 조건이 꽤 달라도 궤적이 위상공간의 특정 영역으로 끌려가 그 안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궤적을 끌어들이는 영역이 끌개이다. 한 점으로 모이거나 같은 고리를 도는 끌개는 예측이 된다. 카오스 계의 끌개는 다르다. 궤적은 그 영역에 갇히지만 영역 안에서 같은 경로를 되풀이하지 않고.. 바짝 붙어 출발한 궤적끼리도 점점 벌어진다. 이것을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라고 부르며 로렌즈 끌개가 대표이다. 개별 궤적은 끝내 예측되지 않아도 계가 벗어나지 않는 경계는 잡힌다.

해밀턴 방정식은 고전역학을 가장 아름답게 정리한 틀이지만.. 출발할 때 전제를 하나 깐다. 계의 엔트로피 변화 dS = 0 이다. 에너지가 흩어지지 않는 보존계에서만 성립한다. 여기서 S는 엔트로피이며 최소작용 원리를 말할 때 쓰는 작용과는 다른 기호이다. 실재하는 계는 dS > 0 이므로 해밀턴이 기술하는 세계는 소산의 흐름에서 떼어 낸 스냅샷이다.

최소작용은 특수한 조건하에서 이상한 끌개들 속에서 출현하는 특수한 끌개 패턴으로 보아도 연결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나비효과가 충분히 억제된 닫힌 구역에서만 끌개가 해밀턴의 최단 경로로 나타난다. 과학은 그 구역에서 거둔 성과이다. 나비가 지배하는 거대한 바다에서 떠낸 물방울 하나이고.. 현대 문명의 물리적 기반 전체가 그 물방울 위에 서 있다.

4. 소산가속을 통한 경로 단축

엔트로피가 늘어나는 흐름은 낮은 엔트로피의 출발점에서 높은 엔트로피의 종착점으로 간다. 그 흐름 속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국지적인 질서가 생긴다. 욕조의 물은 그냥 빠지지 않고 소용돌이를 튼다. 데워진 냄비 바닥의 물은 벌집 모양의 대류 칸을 만든다. 질서는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예외처럼 보이지만.. 에너지가 흩어지는 속도를 끌어올리는 쪽으로 생긴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일리야 프리고진은 이런 구조를 소산 구조(dissipative structure)라고 불렀다.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열린계가 엔트로피를 바깥으로 내보내며 국지적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가 소산을 늘린다. 막스플랑크 생지화학연구소의 악셀 클라이돈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지구 시스템 전체를 태양 에너지에서 일을 뽑아내는 소산 구조의 위계로 보고.. 생명이 그 소산 활동을 한계까지 키우고 한계 자체를 밀어 올리는 쪽으로 진화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계열의 논의는 최대 엔트로피 생산 원리(Maximum Entropy Production principle)라는 이름으로 묶이며 클라이돈의 논문 「Life, hierarchy, and the thermodynamic machinery of planet Earth」에 정리되어 있다. 이 원리는 합의된 법칙이 아니라 논쟁 중인 가설이고.. 생명의 출현을 설명하는 후보도 이것 하나가 아니다. 이 글은 이 가설을 받아들여 그 위에서 서술한다.

여기서 핵심어는 소산이 아니라 가속이다. 식어 가는 돌도 소산한다. 국지적 질서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없을 때보다 엔트로피 생산을 빠르게 한다는 점이다. 출발점에서 종착점까지 가는 경로를 단축하는 장치이다. 이 글은 그런 질서를 소산가속장치라고 부른다.

햇빛이 드는 웅덩이에서 작은 질서들이 모이고 갈라진다.
햇빛이 드는 웅덩이에서 작은 질서들이 모이고 갈라진다.

5. 외막으로 갈라진 안과 밖

소산가속장치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골디락스 임계점마다 위상 수렴이 일어나 무언가가 실체화되고.. 그렇게 실체화된 것이 다음 임계점이 나타날 조건이 되었다. 앞 단계가 다음 단계의 발판이 되는 구조이다. <인지공리01_0>에서 말한 확보된 거점이 우주의 시간 규모에서 반복된다.

그 사다리의 결정적인 한 단이 외막이다. 외막을 기준으로 안과 밖이 갈라지고.. 에이전트의 경계가 물리적 구조체가 된다. 막 안쪽에는 바깥과 다른 농도와 배열.. 곧 국지적 질서가 선다. 가장 먼저 선 대표 사례는 세포막이다. 물에 들어간 지질 분자는 물을 꺼리는 꼬리끼리 모이며 저절로 이중막 주머니를 만든다.

외막은 세포 한 겹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포가 모여 개체를 이루면 피부.. 껍질.. 외골격.. 나무껍질이 개체 전체의 외막이 된다. 외막의 재료가 살아 있는 조직일 필요도 없다. 규조류는 이산화규소.. 곧 유리 성분의 껍데기를 두르고 조개는 탄산칼슘 껍데기를 두른다. 산호의 폴립들은 탄산칼슘을 분비해 군체 공동의 외골격인 산호석을 쌓는다. 폴립이 죽어도 산호석은 남아 다음 세대가 그 위에 다시 쌓으며.. 외막이 그대로 다음 세대의 거점이 된다. 나무도 같은 구조를 한 개체 안에 품는다. 줄기의 대부분은 죽은 조직이다. 살아 있는 것은 나무껍질 바로 안쪽의 얇은 형성층과 체관.. 그리고 잎과 새순과 뿌리 끝 정도이고.. 물을 나르는 물관조차 죽은 세포가 속을 비우고 이어진 관이다. 죽은 조직이 버팀대이자 물길이 되어 살아 있는 얇은 층을 떠받친다. 그 사이에는 기관이 각자 자기 막을 두르고 중간 구조로 끼어 있다. 오늘의 생태계를 채운 개체들은 세포막 위에 기관의 막.. 그 위에 개체의 외막이 포개진 겹겹의 경계로 이루어진 구조체이다. 규모가 달라도 하는 일은 같다. 안과 밖을 가르고 안쪽 질서를 지킨다.

막 안의 질서는 가만두면 무너진다. 바깥으로 새고 섞이고 흩어지는 자연적 소산이 쉬지 않고 안쪽 질서를 평형 쪽으로 끌어내린다. 외막을 가진 구조체가 존속하려면 이 흐름을 거슬러 안쪽을 계속 다시 세워야 하고 거기에는 에너지가 든다. 산것이 에너지를 쓰는 첫째 이유는 자기 안의 질서를 외부의 소산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다.

6. 광자에서 ATP로

방어에 쓰는 에너지의 가장 흔한 원천은 가까운 항성이다. 태양에서 온 광자가 색소 분자에 흡수되면 그 에너지가 화학 결합으로 바뀌어 저장된다. 산것은 이렇게 저장한 에너지를 ATP라는 분자로 잘게 나눠.. 막을 지키고 물질을 나르고 구조를 다시 세우는 자리마다 꺼내 쓴다. ATP는 산것이 쓰는 에너지 화폐이다.

이 장면이 소산가속의 한 사례이다. 광자는 산것이 없어도 결국 열로 흩어진다. 산것은 그 광자를 붙잡아 일을 시킨 뒤 열로 내보낸다. 안쪽의 질서를 지키는 일이 바깥 전체로 보면 에너지가 흩어지는 경로를 하나 더 늘리고 빠르게 만든다. 방어와 가속이 한 동작이다.

7. 복제와 팽창

환경은 변하고 한 번 세운 구조체가 그대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산것은 구조체를 키워 팽창하고 둘로 나누며.. 개체가 다음 개체를 만든다. 복제와 팽창이 거듭되면서 조금씩 다른 변형이 생기고 변한 환경에 맞는 쪽이 남는다. 진화는 이 메커니즘으로 일어난다.

ATP를 쓰는 구조체 안에서 스스로를 복제하는 구조가 안정되자.. 그 구조가 DNA라는 설계도로 거점화되었다. ATP와 DNA는 따로 얻은 두 장치가 아니다. ATP의 A인 아데닌은 DNA를 이루는 네 염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DNA는 에너지를 쓰는 구조체의 복제 구조가 굳어 다음 개체로 넘어가는 거점이다.

정리하면 산것은 외막으로 바깥과 갈라진 구조체이고.. 항성의 광자에서 얻은 에너지를 ATP로 꺼내 써 안쪽의 질서를 외부의 소산으로부터 지키며.. 복제와 팽창을 거듭하고 그 복제 구조를 DNA로 거점화해 변하는 환경을 따라 진화하는 에이전트이다.

8. 설계자 없는 출현

산것은 엔트로피 법칙의 예외가 아니다. MEP 가설을 따르면 엔트로피가 늘어나는 흐름 위에서 그 흐름을 가속하는 방향으로 자기를 조직한 에이전트이다. 이 출현을 설명하는 데 설계자는 필요하지 않다. 왜 그렇게 설계되었는가를 묻는 순간 이미 설계자를 전제하게 되고.. 완전한 원형이 먼저 있다는 이데아론의 틀로 들어간다. 흐름과 끌개와 임계점만으로 출현은 담담하게 서술된다.

다음 글은 이 산것이 어떻게 눈과 뇌와 손을 얻고 상징을 다루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인지연산의 주체인 산자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