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보된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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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보된 거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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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에서
자일을 박고 로프를 건 후 기어오르는 것
기어올라서 또 자일을 박고 또 로프를 건 후
또 기어오르고
기어오르다 떨어져도 자일을 박은 곳까지는
로프를 타고 훨씬 쉽게 다시 회복한다
결국 정상에 도달해서 로프를 뽑아올리면
다닥 다닥 자일들이 박혀있게 된다
기어 올라온 길을 따라서….

이것이 확보된 거점의 개념이다
[도전과 실험]에서 백업지점이 되는
갈무리된 완결부위

완결이란
완벽을 향한 강박을 절단하고
그 지점의 최선을 찾아 갈무리해 둔 후
다음 거점으로 눈을 돌린다는 것이다

이것에 실패하면
제자리만 맴돌게 된다

1.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절차이다

위 글은 2009년에 썼다. 등반 이야기처럼 읽히지만 실제로 다루는 것은 작업을 어떤 단위로 끊어 쌓을 것인가이다.

확보점은 등반자가 올라가는 동안 박아 두는 고정점이어서, 추락해도 마지막 확보점까지만 떨어지고 거기서 다시 오른다. 확보점이 없으면 한 번의 추락으로 출발점까지의 전부가 지워진다.

작업에도 같은 것이 필요하다. 어디까지 확정되었는지 표시해 두지 않으면 판단 하나가 틀렸을 때 돌아갈 자리가 없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고, 그래서 같은 자리를 여러 번 지나게 된다. 능력이 모자라서 생기는 일이 아니라 확보점을 박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다.

확보점을 지나며 오른다. 떨어져도 마지막 확보점까지다.
확보점을 지나며 오른다. 떨어져도 마지막 확보점까지다.

2. BS 와 FoB 는 다른 것이다

필명 Bs2FoB 는 두 낱말을 담고 있다. BS 는 base 이자 basic 으로, 타불라 라사에 해당하는 인식을 비운 출발점이며, 무엇을 알고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 자리여서 모든 검토가 여기서 시작한다. FoB 는 forward operating base, 곧 전진거점으로, 다음 진격의 발판인 동시에 추락했을 때 돌아올 회복선이고, 아직 끝이 아니지만 여기까지는 확정되었다는 표시이다.

둘을 가르는 것은 확정된 것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BS 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고 FoB 에는 검증을 통과한 결과가 놓여 있으므로, 작업이란 BS 에서 출발해 FoB 를 세우는 일이 된다.

3. FoB 는 다음 사이클의 BS 가 된다

여기서 구조가 순환한다. 안정화된 FoB 는 다음 사이클의 BS 가 되므로, 한 번 세운 거점은 결론이 아니라 그 위에서 다시 인식을 비우고 출발하는 자리이다. 이번에 확정한 것은 다음 검토가 물려받는 전제가 아니라 다음 검토가 딛는 바닥이 되고, 성과는 다음 시행착오의 재료로 넘어가 무한히 재활용되고 상향된다.

이것이 2 가 하는 일이다. Bs2FoB 는 두 지점의 이름이 아니라 한 지점이 다른 지점으로 넘어가는 운동의 이름이다.

레지에 서서 위를 본다. 아래로는 지나온 확보점들이 남아 있다.
레지에 서서 위를 본다. 아래로는 지나온 확보점들이 남아 있다.

4. 완결은 완벽이 아니다

완결과 완벽은 방향이 반대인데, 이 둘을 겹쳐 놓는 데서 작업이 가장 자주 깨진다. 완벽은 더 고칠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고, 완결은 지금 지점의 최선을 갈무리하고 손을 뗀다는 판정이어서, 완벽을 겨누는 한 작업은 끝나지 않고 거점도 서지 않는다.

그래서 완결은 완벽을 향한 강박을 절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잘라내는 일이 먼저이고 갈무리가 그다음이며, 순서를 바꾸면 절단이 영원히 미뤄진다. 되는 데까지를 확정한 뒤 무엇을 확보했고 무엇이 남았는지 밝히고 넘어가는데, 남은 것을 적어 두는 일까지가 갈무리에 들어간다.

5. 거점을 세우지 않고 있다는 신호

한 문제에 매달려 같은 자리를 여러 번 시도하고 있다면 거점을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도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실패했을 때 돌아갈 지점을 만들어 두지 않아서 매번 같은 거리를 다시 오르게 된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남은 과제로 나열하고 승인을 기다리는 것도 같은 자리에 있다. 판단이 실제로 갈리는 지점이 아니라면 물어볼 것이 없고, 묻는 동안에는 거점이 서지 않는다.

6. 남는 것

정상에 도달해 로프를 뽑아 올리면 올라온 길을 따라 확보점들이 박혀 있고, 그 배열이 곧 기록이 된다. 어디를 지나 여기까지 왔는지가 거기에 남는다.

이 연작도 그렇게 쓴다. 한 편이 하나의 거점이고 다음 편은 그 위에서 출발한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궤적. 확보점의 배열이 올라온 길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궤적. 확보점의 배열이 올라온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