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력이라는 낱말에 뭉쳐 있는 것
지능 또는 지력이라는 낱말은 일상에서도 학계에서도 널리 쓰이지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IQ 검사가 재는 것.. 전문가가 발휘하는 것..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이 가진 것.. 배우는 속도가 빠른 것.. 문제를 잘 푸는 것이 전부 한 낱말로 묶인다. 이 뭉개짐은 말버릇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가 다른 인지연산들이 한 용어 아래 섞여 있고 그 섞임이 실제로 판단을 그르친다.
기존 이론이 이것을 풀지 못한 것은 지력이 유효한지를 판정할 외부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커텔과 혼의 유동지능·결정지능 이분법은 재료와 추론 능력을 어느 정도 갈라놓았지만 무엇이 유효한 지식이고 무엇이 유효한 추론인지를 가르는 기준은 담지 않았다. 능력을 분류했을 뿐 유효성을 따지지 않은 틀이다.
앞의 두 글이 그 기준을 세웠다. 가추는 가설 공간을 여는 유일한 연산이고.. 실용의 격률과 정보량은 연 것이 무엇을 바꾸는지로 판정하며.. 그 판정은 목적 없이 서지 않는다. 이 기준을 대면 지력은 능력의 분류가 아니라 유효성의 판정이 되고 뭉쳐 있던 것이 셋으로 갈린다. HI(Hard Intelligence 기반지력).. SI(Soft Intelligence 선별지력).. PI(Performance Intelligence 대응지력)이다.
2. HI — 기반지력
흔히 도메인 지식이나 진짜 전문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이 HI이다. 전문가와 아마추어 사이의 검토력과 문제해결력 격차를 만드는 정보량의 차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도메인 지식이라는 말은 중요한 것을 가르지 않는다. 파인만의 말을 빌리면 새의 이름을 아는 것과 새를 아는 것은 다르다.
동료 검토를 거쳐 다듬어진 전문 용어는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다. 용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관측 경로가 그 안에 압축된다. 그 압축을 제대로 풀어 익히면 이름이 HI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그러나 이름이 내용물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어린아이의 말로 풀어낼 수 없다면 포장지를 들고 있을 뿐 내용물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HI는 이름에 담긴 관측 경로를 따라 대상 자체에 도달한 것만을 가리킨다.
HI의 자격은 출처나 얻은 방식이 아니라 정보량 하나로 정해진다. 경험에서 왔든 논리에서 왔든 그 명제가 불확실성을 실제로 줄이면 HI이고 줄이지 못하면 HI가 아니다. 그럴듯한 형식을 갖춘 신념이 HI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상태도 배제하지 않는 명제는 정보량이 0이다. 그리고 정보량은 목적에 대해 잰다. 같은 명제가 어떤 목적 앞에서는 HI이고 다른 목적 앞에서는 잡음이다. HI는 쌓아 둔 창고가 아니라 목적이 꺼내 쓸 수 있는 재료의 누적이다.
3. SI — 선별지력
SI는 정보량이 없는 명제를 걸러내는 연산이다.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이다. 기반은 A와 not-A의 이분법이며 어떤 전제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형식 논리이다. 범주를 나누고 경계를 긋고 주소를 매기는 인지 작업의 대부분이 이 이분법 위에서 돈다.
SI가 실제로 하는 일은 셋이다. 모호하게 그어진 경계를 잡아내고.. 논증 안에서 건너뛴 연결을 잡아내고.. 정보량 없는 명제를 빼거나 검토를 보류한다. SI는 지식을 만들지 않고 오염을 걷어낸다. SI가 모자라면 그럴듯하지만 짚어 보면 말이 안 되는 명제를 포장지째 쌓아 두고 참조하게 된다.
SI가 HI와 따로 작동한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 준다. 소크라테스는 도공.. 장군.. 시인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분야에 대한 HI 없이도 질문만으로 상대의 HI 안에 든 노이즈를 드러냈다. 무엇을 노이즈로 볼지도 목적이 정한다. 소크라테스는 기술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물었다.
4. PI — 대응지력
PI는 목적의 달성에 대한 기여 강도를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능력이다. HI와 SI를 재료와 도구로 쥐고 실제로 목적을 향해 운용하는 쪽이다.
처음 이 삼분법을 정리할 때 PI는 HI와 SI를 운용해 정보량이 높은 새 명제를 만들어 내는 능력으로 적었다. 틀린 정의는 아니었지만 판정 기준이 산출물의 새로움에 걸려 있었다. 앞의 글에서 세운 명제를 대면 기준이 바뀐다. 의미 있는 인지연산은 실용의 격률을 통과하고 격률을 통과한 연산은 목적을 품는다. 그렇다면 연산이 완성되었는지는 목적이 달성되었는지로 판정되고 PI는 그 달성을 끌어내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새 명제를 내지 않아도 이미 있는 명제를 골라 목적에 정확히 꽂는 것 역시 PI이다.
PI의 작동 방식은 가추이다. 목적을 향해 어느 방향으로 공간을 열지 정하고.. 연 공간에 HI를 재료로 넣고.. SI로 오염을 거르고.. 세계에 대 보아 갱신한다.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는 대부분 PI가 압도적으로 높은 상태이다. 머리가 좋다거나 총명하다는 말은 주로 SI를 가리키고 PI와는 다르다.
5. 세 축은 비대칭으로 이어진다
이 정의에서 세 축은 나란히 선 세 능력이 아니다. HI는 재료이고 SI는 거르는 도구이며 PI는 둘을 운용해 연산을 완성하는 쪽이다. 그래서 HI와 SI의 값도 PI가 운용한 결과로만 드러난다. HI를 얼마나 쌓았는지.. SI가 얼마나 정밀한지는 그 자체로 성과가 되지 않는다.
재료와 도구 사이에도 방향이 있다. HI가 많아도 SI가 낮으면 오염된 재료가 그대로 PI에 들어간다. 결과물은 그럴듯한 포장을 갖지만 안에는 건너뛴 연결과 흐린 경계가 쌓인 채로 참조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HI 자체가 썩는다. 반대 방향은 성립하지 않는다. SI가 높고 HI가 빈약하면 결과물이 적을 뿐 HI가 오염되지는 않는다. SI 결핍은 HI를 천천히 부식시키고 HI 결핍은 SI를 부식시키지 않는다. 이 비대칭이 삼분법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적 결과이다.
SI에는 상태가 있다. 늘 같은 세기로 켜져 있는 능력이 아니라 날이 서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HI가 충분히 갖춰져 있고 목적이 분명하면 PI가 폭발한다.
6. 세 거점 위에서
가추가 공간을 열고.. 격률과 정보량이 연 것을 판정하고.. 판정은 목적 위에서 선다. 지력 삼분법은 이 세 거점을 딛고 지력이라는 낱말을 셋으로 갈랐다. 인지연산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PI의 운용이고 HI와 SI는 그 운용을 거쳐서만 값을 드러낸다.
이 틀에도 경계가 하나 있다. HI.. SI.. PI라는 이름이 대상을 가리키는 지도가 아니라 대상을 대신하는 포장지로 쓰이기 시작하면 삼분법은 또 하나의 이름 묶음이 된다. 정보량이라는 외부 기준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이름이 포장지로 변하는 것을 스스로 막는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은 읽는 사람의 SI이다.